“100여 년 전 김포는 포구의 도시였다.”
김포문화재단 「김포의 옛 포구(浦口) 추가종합학술조사」 완료
김포문화재단(대표이사 최해왕)은 지난 4월 완료된 김포의 옛 포구(浦口) 종합학술조사에 이어 추가 종합학술조사를 이달 초 완료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
포구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원형복원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실시된 이번 조사는 (재)한울문화재연구원이 용역을 담당했으며, 고지도와 고문헌, 주민 인터뷰를 통해 진행되었다.
특히 1, 2차 조사를 통해 주요 포구들에 대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기존에 알려진 명칭 외의 포구명이나 지명이 새롭게 밝혀졌다는 점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1차 조사에서 조강포는 지번 가운데‘조강포’소유의 땅이, 강령포는 ‘용강리’소유의 땅이 포구였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2차 조사 결과 이곳은 무사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며 제사를 올렸던 당산(堂山)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포구 주변 주민들의 전언을 통해 조강포, 강령포, 섶골나루 등에는 어물(魚物)의 신선도 유지를 위해 얼음을 저장했던 빙고(氷庫)가 있었으며, 새우젓창고와 쌀창고(공출창고) 등이 존재했음을 확인했다.
한편, 같은 포구라도 시기나 기록에 따라 명칭이 상이하게 등장하고 있으며, 기존에 알려진 명칭 이외의 포구명이나 지명이 새롭게 밝혀지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666년, 덕포진(德浦鎭)이 강화에서 통진으로 옮겨지면서 1696년의 지도에는 ‘신덕포(新德浦)’의 명칭으로 기록되었으며, 1909년에는 ‘상신포(上新浦)’로, 1919년의 근대지도에는 다시‘신덕포’로 명칭의 변화가 있었음을 확인했고 1696년의 지도에서 신덕포 주변에 마당포(馬堂浦), 성포(成浦), 고양포(高陽浦), 호포(好浦) 등의 포구가 있었음을 추가로 확인했다.
또한 19세기 중엽의 고지도와 일제강점기 지적원도를 통해 조강(祖江)을 사이에 두고 통진군(현 월곶면)의 조강포(祖江浦)와 마주보고 있는 북쪽의 풍덕군 임한면에도 ‘조강진(祖江津)’이라는 동일한 이름의 포구가 있었으며, ‘上조강리’와 ‘下조강리’라는 지명이 함께 있음이 확인되었다.
한편, 각 포구의 어물들이 어디로 판매되었는지도 파악되었다. 한국수산지(1908)에 따르면 당시 하성면의 전류리포구, 석탄포, 마근포 등은 서울시장(京城市)로, 월곶면의 조강포, 돌내포 등은 읍내시장(邑內市)으로, 대곶면의 쇄암포, 어모포 등은 오라리시장(吾羅里場)으로, 현재는 인천 소속인 안동포의 어물은 부평시장(富平黃場)으로 각각 판매되었다.
100여 년 전, 김포에는 강안과 해안을 따라 형성된 주요포구들 이외에도 크고 작은 수십여 개의 포구들이 물길을 따라 내륙 깊숙이까지 존재했다. 그러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제방을 쌓으며 내륙포는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는 지명에서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게 되었으며, 30여개의 포구 가운데 대명포, 전류포, 신덕포, 원모루나루 4곳만이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문화재단 최해왕 대표이사는 “고지도와 근대지도, 일제강점기 지적원도와 토지조사부 등의 조사와 주민 전언조사 등으로 얻은 결과를 통해 김포 옛 포구에 대한 자료를 기록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김포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내륙으로 통하는 물류유통의 중심지로 한강과 역사를 같이 했다.”며 “앞으로도 정밀 지표조사와 종합정비계획, 시발굴조사 등의 작업을 거쳐 포구를 대표적인 문화관광자원으로 육성하여 김포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나가겠다.”고 밝혔다.
김포티브이 조한석 기자 (1chohs@hanmail.net-